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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피해자라는 환상: 성폭력 피해 경험과 사회적 시선

by 수박나무 2025. 12. 8.

서론: ‘피해자다움’의 덫에 갇힌 진실

우리가 성폭력 피해 경험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무엇일까. 김지연 작가의 소설 『공원에서』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깊은 성찰을 던진다. 소설 속 주인공 수진은 공원에서 폭행을 당하지만, 사건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피해자다움’이라는 사회적 잣대에 얽매인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 행동이나 관계가 사건의 신빙성을 해칠까 두려워하며, 결국 진실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다.

이는 비단 소설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할 때, ‘내가 과연 피해자다울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마주한다. 사소한 실수 하나가 자신의 진술 전체를 ‘가짜’로 만들 수 있다는 불안감, 그리고 ‘맞을 만한 짓을 했다’는 사회적 낙인이 두려워 입을 다무는 경우가 많다.

성폭력 피해자로서 내 이야기를 꺼내려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문장들은 ‘내가 이야기를 망치면 안 된다’, ‘내 고통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현실은 성폭력 피해를 둘러싼 사회적 인식과 제도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드러낸다.


본론 1: ‘피해자다움’을 입증해야 하는 현실

1.1. ‘완벽한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환상

소설 『공원에서』는 성폭력 피해자가 겪는 복잡한 심리와 사회적 압력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주인공 수진은 자신을 폭행한 남자를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유부남과의 관계가 알려지면 누구도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기영의 말을 떠올린다. 이는 성폭력 피해자가 겪는 가장 큰 고통 중 하나, 바로 ‘피해자다움’을 입증해야만 비로소 피해자로 인정받는 현실을 보여준다.

피해자는 자신이 처한 상황과 관계, 심지어 과거의 행동까지도 ‘피해자다움’이라는 틀에 맞춰야만 사회적 지지를 얻을 수 있다. 만약 피해자의 행동이나 성격이 ‘이상적’인 피해자의 모습과 다를 경우, 그 진술은 쉽게 의심받거나 왜곡될 수 있다.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의 행동과 성격과 생활 방식 전체가 문제시된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피해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1.2. 증거 부족과 신뢰의 문제

실제 성폭력 사건에서 CCTV나 목격자 등 명확한 물적 증거를 확보하기란 쉽지 않다. 대부분의 성폭력 사건이 은밀하게 발생하기 때문이다. 뉴스 기사의 필자는 성추행 사건을 준비하면서 겪었던 어려움을 토로한다. 사건 직후 동거인에게 말하지 못했고, 직장 동료에게 물었지만 기억하지 못했다. 심지어 사건 발생 1년 후 카카오맵에 남긴 후기조차 변호사들은 ‘증거로서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증거가 부족한 상황에서 피해자의 진술은 더욱 중요해진다. 그러나 ‘일 년간 어떤 증거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피해자의 진술 신빙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만드는 현실은 안타까운 부분이다.

사건일로부터 일 년쯤 지나 내가 카카오맵에 남긴 후기가 있긴 했다. 피해 사실에 대한 설명과 여성들에게 ‘조심하라’는 당부를 적은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피해자가 겪는 고통을 더욱 가중시키며, 진실 규명을 어렵게 만든다.


본론 2: 정신과 치료 이력과 ‘정신병’이라는 낙인

2.1. 상담 기록의 양날의 검

뉴스 기사의 필자는 자신의 성추행 피해 경험을 증명하기 위해 정신과 상담 기록을 증거로 활용하려 했다. 몇 달간 주치의에게 ‘성추행의 플래시백으로 고충이 있다’고 이야기했던 기록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오히려 필자에게 큰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상담 기록에 조현병 치료에 사용되는 상병코드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우울증 치료를 위해 다른 약에 대한 부작용 때문에 해당 약을 처방받았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외부에서는 ‘정신과 병력이 많다’는 정보로 인해 진술이 ‘망상이나 신경과민’으로 치부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생겼다.

‘내 피해 진술 전체가 망상이나 신경과민으로 치부되면 어떡하지?’

이는 정신과 치료 이력이 성폭력 피해자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붙을 수 있으며, 진실을 말할 자격을 박탈당할 수 있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2.2. 여성과 정신 건강: 이중의 낙인

필자는 정신과 치료 이력이 자신의 진술 신빙성을 해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여성’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욱 깊어졌다고 말한다. 여성 피해자의 말이 ‘과장’이나 ‘감정적’이라고 치부되는 사회적 편견, 그리고 ‘꽃뱀’이라는 의심을 먼저 받는 시선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정희진 연구자는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에서 여성 피해자의 경우, 사실 자체가 부정되는 경우가 빈번하며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행동과 성격이 문제시된다고 지적한다. 이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성녀’, ‘창녀’, ‘미친 여자’라는 틀에 갇히기 쉬우며, 정신 건강 문제까지 겹칠 경우 ‘미친 여자’라는 낙인이 더욱 강력하게 작용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여성 피해자에게 ‘무결한 피해자상’을 요구하는 공통된 경향은 변함없다.

이러한 이중의 낙인은 피해자가 진실을 말하려는 용기를 꺾고, 사회로부터 고립되게 만든다.


본론 3: ‘다르보’ 전략과 입체적 여성상에 대한 갈망

3.1. DARVO: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를 뒤바꾸는 전략

최근 논란이 된 영화배우 조니 뎁과 앰버 허드의 법적 공방은 ‘완벽한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앰버 허드가 폭력에 맞서 같이 대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소시오패스’로 낙인찍혔다. 반면 조니 뎁은 충격적인 메시지를 보낸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비난을 피해 갔다.

박상현 작가는 이러한 현상을 ‘다르보(DARVO; Deny, Attack, and Reverse Victim and Offender)’ 전략의 예로 설명한다. 이는 혐의가 있는 남성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대신, ‘사실은 내가 피해자’라며 상황을 뒤집어 여성을 공격하는 전략이다.

대중은 앰버 허드와 같은 여성에게 ‘착하고 죄 없는 피해자’ 혹은 ‘남자를 속이고 괴롭히는 소시오패스’ 중 한 역할만을 허용한다.

이는 남성은 입체적으로 이해하지만, 여성은 평면적인 존재로만 바라보는 사회적 편견을 드러낸다. ‘여자가 유별나다면 17세기에는 마녀였고, 21세기에는 소시오패스’라는 표현은 이러한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3.2. 인간은 결점을 가진 존재

성폭력 피해자에게 모든 면에서 흠결 없고 피해자다워야만 진실을 말할 자격을 얻는다는 기준은 잔인하다. 인간은 누구나 결점을 가지고 있으며, 인정과 보호가 필요한 상황에서 이러한 결점이 오히려 공격의 빌미가 되는 것은 부정의하다.

병은 병이고, 진실은 진실이다. 피해자가 수동적이고 착한 ‘피해자다움’과 맞지 않는 모습을 보이거나, 평소 도덕적이지 않은 면모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이 성범죄의 본질에서 눈을 돌릴 이유는 될 수 없다.

피해자 진술의 객관성은 피해 여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성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사회의 태도에 따라 결정된다.

이는 피해자의 개인적인 특성이 아닌, 사회가 피해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태도가 진실 규명에 더 중요함을 시사한다.


결론: ‘흠결 많은 피해자’도 말할 권리가 있다

소설 『공원에서』의 문장처럼, 우리는 모두 대체로 논리정연하지 못하고, 늘 뭔가를 빼먹고 까먹고 헷갈리기 일쑤다. 필자 역시 성폭력 피해 외에도 다양한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왔고, 더 건강해지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남아있다. 하지만 이러한 개인적인 흠결이나 약점들은 성폭력 피해 경험의 진실성을 훼손하지 않는다.

당신은 피해자의 자격을 얻을 만큼 완벽한가요?

이 질문은 우리 사회가 피해자에게 요구하는 ‘완벽한 피해자’라는 환상에 대한 근본적인 반문이다. 흠결 많고 불완전한 존재인 우리 모두가 세상에 말을 건넬 권리가 있으며,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진정한 정의 구현의 시작이다.

우리의 사회는 ‘완벽한 피해자’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인간의 복잡성과 불완전함을 포용하며 진실을 마주해야 할 것이다.